선험적 (A priori) : 선험적인 것(a priori)은 17세기 이후 인식론(epistemology)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단어이다. 선험적인 것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 혹은 명백함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 혹은 정당성과 관련된다. 선험적 진리는 흔히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로부터 독립된 가지성(knowable)과 타당성 혹은 정당성(justifiable)을 가진다고 한다. 선험적 개념 역시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에 근거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후험적 지식(a posteriori knowledge)은 경험적 실험적 지식이고, 선험적 지식은 비-경험적 지식이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으론 수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후험적 지식은 자연 과학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유지승 씀) -> 후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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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후험적 (A posteriori) - 유학장만의 철학사전
후험적 (A posteriori) : 17세기 이후 인식 이론에서 ‘후험적’(a posteriori)이란 용어는 매우 유명한 용어이다. ‘선험적’이란 것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 혹은 명확성에 근거한 지식 혹은 정당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후험적 진리는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로부터 분리되어 알려 질 수 없는 진리이다. 또 후험적 개념 역시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로부터 분리되어 얻어질 수 없는 개념이다. 후험적 지식은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과 비교된다. 선험적 지식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은 증거를 요청하지 않는 지식이다. 즉 선험적 지식은 비-경험적 지식(non-empirical knowledge)이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과 구분하여 후험적 지식은 경험적이며(empirical), 풀어 쓰자면 경험 의존적 지식(experience-based knowledge)이다. 후험적 진리의 일반적 사례는 실험과 관찰에 의존하는 자연 과학과 일반적인 지각 경험의 진리들이다. 반면 선험적 진리의 일반적 사례는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들이다. 칸트(I.Kant)의 『순수이성비판』(1781/1787)에 따르면 후험적 지식과 선험적 지식 사이 구별은 경험 지식과 비경험적 지식 사이의 차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중세철학에 있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 존재 증명의 경우는 선천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안셀무스(Anselmus)의 신 존재 증명은 선험적이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의 참됨을 인정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은 원인을 가지며, 원인 없이 있지 않다. 그 자신의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그 원인에 선행하는 원인을 따라서 추적하면 하나의 원인, 즉 신을 가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증명은 경험되어지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생득적인 것 혹은 선험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캄(Ockham)은 『논리학대전』 3-2에서 결론에 절대적으로 선행하는 가정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과 결론에 선행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더욱 더 잘 인식되는 가정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선험적이며, propter quid의 방식이라하고, 후자는 후험적이며 quia의 방식이라 한다. 오캄의 글을 읽어보자. “본질에 의한 증명은 그것의 전제들이 단순히 결론에 선행하는 논증이란 것을 알아야 했고, 그것들은 선험적(a priori) 혹은 본질에 의한 (propter quid) 증명이라 불린다.”(Propter quod oportet scire quod quaedam est demonstratio cuius praemissae sunt simpliciter priores conclusione, et illa vocatur demonstratio a priori sive propter quid.) 또, “그것의 전제들이 단순히 결론에 선행하는 것이 아닌 증명이 있고, 이것은 삼단논법을 하는 이에게 이러한 방식에서 더 잘 알려진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삼단논쟁을 하는 이는 결론의 지식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증은 이유에 의한(quia) 증명 혹은 후천적 증명이라고 한다.”(Quaedam est demonstratio cuius praemissae non sunt simpliciter priores conclusione, sunt tamen notiores sic syllogizanti, per quas devenit sic syllogizans in notitiam conclusionis, et talis demonstratio vocatur demonstratio quia sive a posteriori.) 오캄의 문헌에서처럼 후험적을 의미하는 a posteriori은 이미 칸트 이전에 발견된다. 그러나 현재 많은 경우는 칸트를 통하여 많이 알려진 고민이다. (유대칠 씀) -> 선험적
모나드론 (monadologia) - 유학장만의 철학사전
모나드론 (monadologia) : 17세기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의 대표적인 존재론적 입장이다. 모나드론은 모나드(monad)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하여 신과 세계에 대한 논의로 발전한다. 모나드는 ‘하나’라는 그리스어에서 파생하였다. 하나인 모나드는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 부분을 가지지 않는 이러한 모나드를 전통적인 철학 용어인 실체(實體, substantia)로 규정하며, 그 가운데도 단순 실체로 규정한다. 단순 실체는 어떤 것의 결합으로 부분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이며, 이는 바로 모나드라고 한다. 모든 합성체는 모나드의 집합니다. 그러나 이 모나드를 현미경으로 관찰 가능한 최소 단위의 원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각의 대상이 되기 위해 연장(延長)이나 모양(模樣)을 가져야 하지만, 모나드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다. 또한 이 모나드는 그 자체로 부분을 가지지 않기에, 두 부분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생성이나 그 생성이 해체되며 이루어지는 소멸과 같은 것이 없다. 즉 모나드는 자연적으로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창조(創造)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고, 신의 소멸(消滅) 작용에 의하여 존재를 끝내게 된다. 각각의 모나드는 각각의 성질을 가진다. 이 각각의 다른 성질을 가지는 각각의 모나드는 서로 다르다. 모든 모나드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쉼 없이 변화한다. 또 이 모나드는 여러 겹의 주름을 가진다. 『모나드론』 §64~§69에서 주름은 무엇인가? 단순 실체이며, 존재론적으로 단순, 즉 부분을 가지지 않는 모나드에게 여러 겹의 주름이란 무엇인가? 여러 겹의 주름이란 모나드가 자신 가운데 무수히 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모나드라는 하나의 것 가운데 완전한 우주를 담고 있으며, 이 우주는 다시 무수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현대의 프랙탈(fractal) 구조를 보여주는 듯하다. 프랙탈은 기하학에서 일부 작은 조작이 전체와 유사한 형태를 가질 경우 사용된다. 모나드 역시 이와 유사한 면을 가진다. 모나드는 우주를 담고 있으며, 그 우주는 다시 수많은 모나드로 구성된다. 신은 유일하고 모든 다양성을 포함한다. 가능한 존재들은 모두 신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신은 무한하다. 신은 가장 완전하며 경계가 없는 존재이다. 모나드는 이러한 신보다 덜 완전하다. 신은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 혹은 근거로 인해 선택했다. 여기에서 가능 세계란 개념이 나온다. 신은 수많은 가능 세계들 가운데 현재 존재하는 이 세계를 선택했으며, 이것이 최상의 완전성을 가진다. 가장 완전하고 선한 존재의 선택으로 주어진 이 세계가 가장 최상이란 말이다. 또 이 최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모나드들은 자신의 미래를 품고 있으므로 이 세계는 결정론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이 결정론은 철학적 긍정론에 근거한다. 결국 신이 선택한 최상의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각각의 다양성과 질서 가운데 우주를 담고 있다. 즉 우주를 본다. 그러나 신은 이 모든 모나드들의 원인이기에 이 모든 모나드들의 다양성과 질서를 모두 보고 인식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모나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이는 신을 통해서 가능하다. 신체는 모나드와 달리 자연적으로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분리이며, 신체에 상해가 가해져도 신체의 모나드가 파괴되진 않는다. 정신이란 이성을 가진 모나드이며, 우주의 체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모방함으로 어느 정도의 신성함을 가진다. 신성을 가진 모나드를 가진다는 점에서 정신을 가진 인간은 신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이런 신의 나라는 조화로우며 완전한 정부를 가진다. 이와 같이 모나드는 존재론적 논의에서 시작하여 우주론에 이르는 거대한 라이프니츠 철학의 기본 토대이다. <유지승 씀>
에지디우스 로마누스 혹은 로마의 자일스 (라틴어 Aegidius Romanus 영어 Giles of Rome (c.1243/7-1316) 유학장만의 철학사전
에지디우스 로마누스 혹은 로마의 자일스 (라틴어 Aegidius Romanus 영어 Giles of Rome (c.1243/7-1316) : 에지디우스 로마누스는 13세기 중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주석가이며 신학자였다. 아마도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제자였을 수 있을 듯하다. 이는 그의 철학에 보이는 토마스 아퀴나스 형이상학과 신학의 직접 혹은 간접적 영향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수용은 전적으로 추종적 수용이 아니라, 때때로 비판적 수용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가 중세 철학 연구가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그의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실재적 구분(realis distinctio)과 관련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존재와 본질은 두 개의 완전히 구분되는 실재(res)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존재자들은 구성된다. 이러한 논의에서 그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강의 헨리(Henry of Ghent)와 대립된다. 에지디우스는 이 문제를 합성 실체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에서 논의를 확대하며 전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주석가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의 전통에 있어 의미 있는 기여를 했으며, 특히 장소, 시간, 진동에서의 운동, 연장(extensio)에 대한 논의에서 더 그렇다. 1. 생애 에지디우스는 아마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그는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강의를 1269년에서 1272년 사이 듣게 된다. 에지디우스는 신학 학사(bachelor of theology)로 파리 대학에서 첫 학문적 삶을 시작했으며, 1270년과 1277년 사이 그는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4권을 강의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주해 대부분을 적게 된다. 1277년 그는 그의 관점 가운데 일부가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heterodox Aristotelianism)로 금지 된다. 이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 째 그의 이론이 주된 비판과 금지의 대상이던 시제 브라방(Siger of Brabant)과 같은 인문학부 교수들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일부 신학부 교수들에 대하여 비판적이란 이유다. 예를 들어, 강의 헨리가 그렇다. 반면 강의 헨리는 이 1277년 금지령의 진행에 일조한 철학자이기도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주 영원성의 가능성과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에 대한 이론 등에서 일부 토마스 아퀴나스 노선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역시 일부 금지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면이다. 이러한 1277년 금지령에 대한 이론적 논박을 위해 그는 『형상들의 다수성과 등급에 반대하여』(Contra gradus et pluralitatem formarum)라는 저술을 집필한다. 이 가운데 그는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은 건전한 이론이며, 신앙과 조화되는 이론임을 주장한다. 1277년 이후 에지디우스의 삶을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파리를 떠났을 것이며,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 그는 『왕의 통치에 대하여』(De regimine principum)를 집필한다. 1285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신학 교수로 지명된다. 『논쟁된 질문들』(Quaestiones disputatae)과 임의토론집(Quodlibeta)은 이기에 집필되었다. 그리고 강의 헨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 대한 논의가 주된 논제가 된다. 1287년 그의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공식 이론이 된다. 그리고 1292년 그는 수도회의 최고 지도자(prior general)로 선출된다. 그리고 1295년 교황 보니파치오 8세는 그를 부르주(Bourges)의 대주교에 임명한다. 그리고 당시 교황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교황의 양위에 대하여』(De renuntiatione papae)을 집필하였고, 여기에서 교황의 편에 선다. 또 그는 『교회의 권력에 대하여』(De ecclesiastica potestate)를 집필하였고, 1316년 아비뇽에서 임종을 맞는다. 2. 형이상학 에지디우스는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사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단순한 추종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몇몇 사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비판한다. 비록 대부분의 경우 그의 비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온전히 거부하고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정하고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철학적 문제에 대한 에지디우스의 방법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에지디우스는 언어적 분석과 논증의 논리적 구조에 많은 신경을 쓴다. 에지디우스의 형이상학은 주로 두 가지 입장을 정리된다. 첫 째는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이다. 그리고 하나는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이다. 에지디우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에서 본질과 존재의 구분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분에 대한 자기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렇게 마련된 그의 입장은 더욱 더 극단적이다. 그는 본질과 존재가 두 개의 완벽하게 구분되는 실재(res)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조는 바로 이 본질과 존재의 합성으로 이해한다. 에지디우스에 따르면,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위해, 존재가 본질에 더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해 에지디우스는 ‘지향적 구분’을 주장한 강의 헨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에지디우스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에 대한 입장은 완벽하게 단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철학자들의 오류들』(Errores philosophorum)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모든 합성 실체 가운데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형상들의 다수성과 등급에 반대하여』에선 합설체 가운데 형상의 다수성을 거부한다.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이를 인간 존재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인간 존재를 제외하고 합성체 가운데는 오직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별성의 본성은 에지디우스의 형이상학에서 중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그는 제일 질료는 순수 가능태이며, 실체적 형상의 다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양적 원리(quantitative principle)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질료가 더해져야 한다. 개별화의 원리는 그저 질료로부터 구분되어 있는 양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자의 양적 방식(modus quantitativus)이며, 이것은 무규정적 차원(dimensio indeterminata)이 질료와 함께 한 존재자의 양적 방식이다. 3 영혼과 지식에 대하여 에지디우스의 심리학과 인식론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혹은 아베로에스의 입장을 향한 어떤 경향성을 보이진 않는다. 영혼에 대한 이론에서 에지디우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과 그것의 기능(faticulty)들 사이의 실재적 구분을 따른다. 지식의 이론에서 에지디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따라 감각 경험으로 지식들이 형성된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생득 관념(innate ideas)과 같은 플라톤노선이나 조명설(theory of illumination)과 같은 것을 거부한다. 그는 지적 지식의 시발점은 감각 실체에 대한 감각 인식인 반면 그것의 고유한 대상은 실체의 비질료적 무엇임(the immaterial quiddity)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서 그는 감각 인식으로 부터의 추상(abstractio)하여 얻은 지식을 이야기한다. 에지디우스는 능동 지성(intellectus agens)과 사고가 가능하게 하는 가지상(species intelligibilis)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는 진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따라 ‘사고와 실재의 상응’(adaequatio intellectus et rei)이라고 정의한다. 또 지성의 단일성에서 에지디우스는 강하게 능동 지성의 단일성을 반대한다. 이는 그가 아비첸나의 것으로 돌리는 입장이다. 또 아베로에스의 것으로 돌리는 가능 지성의 단일성 등을 반대한다. 에지디우스는 개별적 지식과 질료적인 형상과 비질료적 형상 사이의 중간적 존재성으로 지성의 존재론적 구조와 개별적 지식은 상이한 실체 가운데 내재함으로 다양화된다는 논리와 신체의 형상이 이성적 영혼일 때 해결된다고 본다. 4 자연 철학 : 에지디우스의 자연 철학 역시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그의 체계적인 자연학적 개념에 대한 논의는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주해』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 저작은 이후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여 애용된다. 예를 들어, 연장, 장소, 시간 그리고 우주 영원성 등에 대한 논의가 그러하며,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서 주해되고 전해졌다. 응축(condensation)과 희박(rarefaction)을 다루기 위해, 에지디우스는 자연적 물체 가운데 내재하는 두 개의 분리된 성질이 있다는 것을 보인다. 육체적 차원은 물체가 응축되고 희박해질 때, 변화하는 것은 물체적 차원(corporeal dimension)이다. 질료의 양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 부피(volume)과 질량(mass) 사이의 강한 유사성을 가진다. 에지디우스는 질료적 장소(locus materialiter)와 형상적 장소(locus formaliter)를 구분한다. 질료적 장소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장소이며, 이는 물체를 포함하는 내적 표면이다. 그리고 형상적 장소는 우주 가운데 장소를 차지하는 물체와 확정된 지점 사이의 질서(ordo) 혹은 거리(distantia)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에지디우스는 형상적 장소 개념을 장소의 불변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질료적 장소와 형상적 장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에지디우스의 관점에서 형상적 장소는 질료적 장소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이다. 질료적 장소와 형상적 장소를 구분하는 그의 발상은 장소의 개념을 지배하는 두 법칙 사이의 구분에서 발견된다. 첫째, 장소를 가진 물체의 연장의 범위 혹은 한계, 둘째, 물체의 운동과 정시를 서술하기 위한 틀. 이 두 가지에서 발견된다. 5. 신학 에지디우스의 신관은 단일성에 집중된다. 신의 단일성은 특히 삼위일체 문제와 관련된다. 이 가운데 그는 신적 관계에 있어 다수성을 넘어선 신적 본질의 단일성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신의 단일성은 신적 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을 포함하진 않는다. 반대로 그의 신적 관계에 관한 이론은 더욱 더 복잡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보다 더 분명하다. 에지디우스의 이론은 관계의 세 종류, 즉 ‘반대’, ‘이격’(離隔, disparate) 그리고 ‘유사’에 근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논의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개념적 장치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신적 관계, 그들의 실재적 구분과 그들의 다수성(multiplicatio) 가운데 선(priority)과 후(posteriority)의 관계가 그렇다. 신적 속성 가운데 무한성(infinitas)은 단일성에 이어 두 번째다. 신의 무한성의 중요성은 특별히 신학의 대상에 대한 문제에서 논의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꾸준히 신학의 대상은 신으로 신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한한 지성은 신의 무한함을 포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신학의 대상은 “우리가 행하는 영광을 기림의 우리의 성취와 회복의 원리”(principium nostrae restaurationis et consummatio nostrae glorificationis)라고 한다. 이러한 형식에 따라서 에지디우스의 입장은 강의 헨리와 폰테인의 고트프리(Godfrey of Fontaines)가 관련하여 오랜 시간 논쟁하게 된다. 에디지우스가 주목하는 점은 유한한 피조물과 무한한 신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다. 말로 표현 조차 할 수 없는 이 거리감에 의하여 인간은 신에 대하여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그는 신적 본성에 대한 이성적 지식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인 결론을 내어놓는다. 다른 신학적 문제에서도 그는 삼위일체는 온전히 신비이며, 인간의 자연 이성으로 온전히 논증되고 증명되며 최종적 답안을 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에지디우스는 설교가이기도 하다. 그는 13세기의 대표적인 설교가이다. 그가 남긴 설교(sermon)는 간단한 그의 신학 논구로 여겨지며, 그의 신학적 사상의 최종적 판단에 대한 간단한 글로 여겨지고 있다. 6. 정치학 에지디우스의 정치 사상은 시간 속 권력을 넘어선 정신적 권력의 우위에 집중된다. 그는 그의 『왕의 통치에 대하여』에서 ‘국가’란 시민 사회 가운데 살려고 하는 인간 본성의 성량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력에 대하여』에서 그는 국가는 정신적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지디우스의 입장에 따르면 시간 속 권력과 정신적 권력 사이의 구분은 인간 존재의 육체와 영혼의 구분에 근본적으로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시간 속 권력에 대한 정신 권력의 우위는 우주의 질서에 근거하기도 한다. 오직 정신적 권력만이 집적으로 신으로부터 유래되고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편 시간 속의 권력은 정신적 권력에 의존되어야하는 것일 뿐이다. (유대칠 씀) ->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퐁테인의 고트프리, 강의 헨리, 중세 자연 철학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아비첸나(Avicenna) - 유학장만의 철학 사전
아비첸나 (Abū ʿAlī al-Ḥusayn ibn ʿAbd Allāh ibn Sīnā, 페르시아어 پور سينا Pur-e Sina(ˈpuːr ˈsiːnɑː) "시나의 아들" c. 980 ~ 1037) : 원래 아랍인이며, 아랍의 원래 이름은 이븐 시나(Ibn Sīnā)이다. 하지만, 흔히 라틴어화 된 이름인 아비첸나(Avicenna)로 많은 서구 학계에 많이 알려졌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치유의 서>는 거대한 철학 작품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백과사전(百科事典)이었다. 또 다른 그의 대표작은 <의학 전범>(The Canon of Medicine)은 대부분 중세 유럽 대학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루벵(Leuven)이나 몽펠리에(Montpellier)의 대학에선 17세기인 1650년에 이르기까지 기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의학 전범>은 기본적으로 겔렌(Galen)과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원리에 따라서 의학의 완벽한 체계를 잡아 이를 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과는 의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의학을 넘어 그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천문학과 심리학, 논리학 등 당시 알려진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아비첸나는 당시 아랍 지방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다. 당시 그리스-로마의 지식은 상당 부분 이슬람 사회로 넘어와 있었다. 예를 들어,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까지 이미 넘어와 나름 이슬람 철학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의 번역을 넘어 이를 주해하며 그들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철학색을 만들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알 킨디(Al-Kindi), 알 파라비(Al-Farabi)와 같은 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비첸나가 자란다. 그의 대부분 저작은 아랍어로 작성되었다. 사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학문언어는 아랍어 그리고 일부는 페르시아어였다. 사실 아랍 지방의 학자들이 당시 지중해 연안의 학계를 주도하였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유럽은 이후 이를 수용하고 번역하는 형편이었다. 아비첸나 역시 대부분 아랍어로 저술을 남겼고, 작품 가운데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일부 책에서 그는 순수한 페르시아어로 글을 적고 있다.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아랍어로 주해하였고, 이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에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었다. 또 매우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비첸나가 살아가던 당시 중세 이슬람 세계에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조화를 위한 충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충돌은 이 둘을 어떤 형태로 조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조화의 분위기는 아비첸나의 철학에서도 뚜렷하게 확인 가능하다. 그는 이러한 조화를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공은 그를 12세기까지 이슬람 철학을 이끄는 주도적 인물이 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은 이슬람을 넘어 서유럽에로 이어진다.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많은 이들도 결국은 그의 영향을 뿌리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였다. 이와 같은 중세 유럽에서 아비첸나의 성공적인 영향력은 특히 ‘영혼의 본성에 대한 문제’와 ‘존재(existentia)와 본질(essentia)의 관계 문제’에 영향을 많이 주게 된다. 그리고 이들 문제들은 서유럽 학계의 핫이슈였다. 즉 아비첸나는 서유럽의 핫이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고, 그 논쟁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의 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수용되지 못했고, 1210년 파리 대학에서 금지된다. 그러나 그러한 금지에도 그의 영향력을 중세를 넘어 근대에 이른다. 중세 서유럽을 대표하는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등은 물론이고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Descartes)에 이르기까지 아비첸나의 영향력을 대단했다. 이러한 대단한 영향력 가운데 형이상학에 한정해 우선 살펴보자. 아비첸나는 알-파라비로부터 존재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流出說, emanationism)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초기 무슬림 신학자들과 달리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거부한다. 우주는 어떤 시작점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주는 신적인 존재의 자연스런 작품이라 주장한다. 이 신적 존재인 순수 선은 질서정연하고 선한 우주를 만듬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주는 시간적으로 신적인 존재를 앞서지 않는다. 아비첸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이는 중세 유럽에 전해진다. 그 논증은 이렇다. 존재가 있다. 우리가 감각 경험으로 익히는 존재자들의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다. 우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연적 존재자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기 외부의 존재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눈에 보니는 존재로부터 이러한 원인의 사슬을 올라가다 보면, 스스로는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것의 존재 원인이 되는 존재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필연적 존재자(wajib al-wujud bi-dhatihi)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신과 유사한 것이다. 하지만 아비첸나는 철학자들의 신과 종교의 신을 동일한 것으로 보진 않는다, 철학자들이 논의는 신은 어디까지나 존재자의 원인, 즉 필연적 존재자로 신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연적 존재자(contingents) 가운데 존재(wujud, existence)와 본질(mahiyya, essence)을 구분한다. 이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 존재하거는 존재자이거나 혹은 동물로 존재하는 존재자 혹은 무생물로 존재하는 존재자...등 이다. 이와 같은 ‘존재’는 어떤 ‘본질’이란 형상을 통하여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존재자는 우연적 존재자이며, 이런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로 구성된다. 필연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참이다. 한편 우연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거짓이며, 그 자신 이외 다른 것에 의하여 참이다. 필연적 존재자는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 근원이며,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자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존재 이외 다른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일자(wahid ahad, One)는 스스로 필연적 존재자이며, 서로 구분하기 위한 종차(fasl, differentia) 없이 스스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아비첸나는 일자와 필연적 존재자는 어떤 류(jins)개념도 없으며 정의(hadd)도 없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반대(did)도 없다. 양, 성질, 관계와 시간, 상태, 장소, 양 등의 범주로부터 구분된다. 즉 존재는 양으로 성질로 관계 등으로 서술되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류와 종차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아비첸나는 자연학에서 알 비루니(Abū Rayhān al-Bīrūnī)와 논쟁하였다. 비룬니는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 철학에 비판적이었다. 한편 아비첸나와 그의 제자인 알 마수리(Ahmad ibn 'Ali al-Ma'sumi)는 비룬니의 비판적 저술에 대하여 부정적이었고, 그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응수하였다. 자연 철학에서 그의 운동에 관한 입장은 이후 관점과 추진력 이론의 선구인 뷔리당(Jean Buridan)의 임페투스(Impetus)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아비첸나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 등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을 넘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철학이 가지는 영향력을 대단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와 본질의 구분과 둔스 스코투스의 이것임(haeceitas)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매우 넓은 영역에서 그의 영향력을 진행되었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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