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인문학 노점상의 철학 이야기 10월 15일

인문학을 육성하자고 이야기를 한다. 간혹 인문학 교실이나 대안공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한 편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것이 필요할까? 당장 먹고 살기 힘든 대부분의 국민들이 있다. 당장 취업으로 인하여 힘든 청년들이 있다. 이런 청년들의 손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공자와 노자가 들려있지 않은 것은 정말 그들의 무지나 무관심 때문일까? 어쩌면 그들이 부자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는 살아야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즉 업자들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하다. 업자이기 때문이다. 업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되는가? 성형외과 의사는 성형수술을 하라고 할 것이다. 당연하다. 업자니까 그렇다. 개고기집 주인은 개고기를 먹으라고 할 것이고, 분식집 주인은 분식을 먹자도 할 것이다.. 다 이유는 같다. 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데 업자가 아닌 사람들의 입장이 중요하다. 결국 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야하니까 말이다. 어떤 이들은 비싼 식당에 비하여 값이 싸고 금방 먹을 수 있는 동네 분식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성형수술을 한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문학을 하는 철학교수나 역사교수 그리고 문학교수들나 관련 종사자들이 아닌 사람들, 즉 업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필요한가? 

많은 이들이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좀 막연하다. 주변에 어떤 이는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앞부분을 읽고 그냥 재미없고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접어버렸다. 그의 손엔 성경책이 있다. 그의 눈에 성경은 거의 모든 인간사 물음의 답이 들어있다. 그러니 윤리학이나 실천철학 혹은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저런 것들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그냥 성경을 읽고 성경의 뜻에 따라 살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는 인문학이 아닌 성경이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이라기 보다는 어떤 명령이 필요하다. 모든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종교인들은 인문학이 필요없다. 그냥 성경이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신의 뜻을 찾는다. 니체를 읽어도 맑스를 읽어도 신의 뜻을 찾는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필요가 없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필요하고, 그 존재의 명령 속에서 모든 답을 구하려 한다. 물론 사람들마다 신의 명령은 다르게 들린다. 어떤 독재자는 자신의 악행 속에서도 신의 뜻을 구할 것이고, 어떤 타락한 목회자도 자신의 역겨운 행위 속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할 것이고, 없으며 자기 최면 속에서 조작을 해 버리기도 할 것이다. 이들에게 인문학, 즉 인간의 힘으로 고민하여 인간의 답을 구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신의 명령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는 신의 명령이 필요하다. 진짜 신의 명령을 구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이기심으로 신의 뜻이라고 해석해버리는 사기술로 사람을 속인다. 하여간 이들에게 인문학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철학은 그저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 잠시 듣는 과목일 뿐일지 모른다.

돈에 미친 이들도 인문학은 필요 없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책들이 있지만, 그 논리는 맘에 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그리고 공자도 자신의 교육이 취업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회를 개혁하는 논리를 만들고 이를 실천하려는 뜻을 가졌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문학을 만드는 과정이나 그 결실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은 돈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플라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철학을 하지 않았다. 공자도 그렇다. 철학, 인문학은 돈을 벌기 위하여, 즉 업자가 되기 위하여 하는 학문이 아니다. 요즘으 논술에 나온다니까 고교생들이 고전을 읽는다. 논술에 나오지 않으면 고전을 읽지 않는다. 필요 없으니 말이다. 논술에 나오기 때문에 읽는 고전은 참다운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는 인문학 고전 강독도 그렇다. 면접을 준비하는 것이 인문학은 아니다. 이들은 인문학의 결실을 공부하지만 이것이 인문학은 아니다. 

신에 의지한 사람도 돈에 의지하는 사람도 인문학에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목사나 신부 그리고 스님도 인문학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취업이나 진학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인간 자신을 들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하면 신을 배신하는 부적절한 행위인가? 웃기다. 인간과 피조물도 신이 창조한 신성한 것이며, 신이 그 좋음을 인정한 위대한 존재들이다. 신의 모상인 인간이 신의 모상으로 자신의 모습으로 스스로 깨우친다면, 그 가운데 자신의 신성함을 느끼고 알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무엇인가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인문학 요즘은 인문학을 말하기 힘든 시대다. 

자본주의 시대, 사람들은 돈으로 가치를 평가한다. 신본주의 시대 신으로 세상을 평가하였듯이 말이다. 인문주의 시대,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자본을 보고 껏을 사용하며 , 인간 스스로의 존재 가운데 신을 볼 때, 인문학은 자생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업자들이 제발 물건 사라고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도 말이다.

우선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가 높여져야 한다. 가치가 높아지면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가운데 인문학을 시작할것이다. 가치가 없고 무시된다면, 사람들은 그 아픔 속에서 생존에 메달리게 되고 결국 인문학을 보기 힘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업자. 인문학자... 그 외부에서 인문학이 어떤 필요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냥 순서 없이 사유대로 따라가며 적어 본다...

BY YU AMBROSIO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대구에 인문학을 위한 작은 노점! 문을 열다!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 라틴어 고전을 우리말로 일반인과 함께!!!


작은 걸음 인문학 노점 문을 열다!

매주 한 페이지 분량의 고전을 발췌해서 번역하면 그것을 두고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생각 있는 분은 연락을 주세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오캄과 스피노자에 등에 이르기까지 고전를 발췌하여 읽을 생각입니다. 제법 많은 글들은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나 목회자분들은 신학사에 나오는 여러 교부들의 글을 한국어로 처음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스피노자와 같은 이들의 글도 길지요. 주요 부분을 라틴어에서 직접 번역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라틴어를 하지 못해도, 제가 직접 번역해서 참가하시는 분은 한국어로 읽을 수 있으며 번역을 하며 고민한 저의 이야기와 함께 풀이도 들을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터 그리고 칼빈 또 둔스 스코투스의 글들도 라틴어에서 우리말로 발췌 번역하여 읽으며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습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한달 참가비도 있고, 한번씩 오시는 분들은 그때 그때 참가비를 내셔도 좋습니다.
참가비 없이 그냥 친목 모임으로 하면 오다가 안오다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번역하고 관련 자료 읽고 공부해서 나누려는 저는 자꾸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고 약간의 참가비를 두려고 합니다.
이 모임이 6개월 정도 지속되면 그때마다 작은 제본 책자로 인문학 나눔의 시간을 담으려고 합니다.
고전학, 철학, 신학, 역사, 문학, 종교 그 이외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 가운데 대구 동성로로 찾아오실 수 있는 분들은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처음 시작해서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사람이 1명이라도 모이는 날이 시작하는 날로 하려고 합니다.
영웅 중심으로 누군가의 철학을 칭송하려는 생각 없이
수많은 철학의 고전 속에 담긴 수많은 고민들을 따라서
지금 우리의 삶과 과거 그들의 삶을 고전이란 공간 속에서 함께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연락주세요.

신청은 wissen34@hanmail.net이나 yudaechil@gmail.com으로 하시면 됩니다. 신청인이 1명이라도 모이면 모임의 시간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대구분들이 저의 페친 가운데 많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생각있는 분은 연락을 주세요.

강의는 대구에 직접 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저의 블로그를 통하여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저 처럼 노력하고 노력하는 사람의 작은 인문학 노점! 그 시작을 축하해주시고 참여해주세요!

시작은 작지만 그 가치는 절대 작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필요하면 외국의 인문학 동료들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조금씩 이루고 있는 저의 작지만 작지 않은 인문학 노점! 많은 응원하고 참여해주세요!

대구 아닌 먼 거리의 분들은 매주가 아니라 한달에 한번이나 격주로 오셔도 좋아요. 전 부디 개점 휴업 상태가 아니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헤리오도루스 (Heliodorus)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 토마스철학학교 소사전


헤리오도루스 (Heliodorus) : 헤리오도루스는 5세기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헤르미아스(Hermias)와 에데시아(Aedesia)라는 두 부부 철학자의 아들이며, 동시에 철학자인 암모니우스의 형제이다. 그의 아버지인 헤르미아스는 헤리오도루스가 어려서 죽는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그와 그의 형제를 양육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장한 그는 이후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로 이주하며, 그곳에서 그는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자인 프로클로스(Proclos)의 아래에서 철학을 익힌다. 아테네 생활 이후 그와 그의 형제 암모니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와 암모니우스는 철학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그에게 철학을 배운 이 가운데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자인 다마스키우스(Damascius)가 있다.

토마스철학학교 철학 소사전 

에데시아 (그리스말 : Αἰδεσία) 여성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소사전


에데시아 (그리스말 : Αδεσία) : 에데시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에 속하는 여성 철학자이다. 그녀는 5세기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살았다. 그녀는 시리아누스(Syrianus)의 친척이며, 헤르미아스(Hermias)의 아내이다. 그녀의 남편인 헤르미아스의 사망 이후 그녀는 그녀의 자녀들인 암모니우스(Ammonius)와 헤리오도루스(Heliodorus)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의 자녀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갔으며, 그녀는 아테데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탁월한 지도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 위대한 아테네의 철학자들 가운데는 프로클로스(Proclos)도 있었다. 그녀가 매우 어렸을 때, 그는 시리아누스에 의하여 프로클로스와 약혼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의 조사(弔辭)는 어린 다마스키우스(Damascius)에 의하여 공표되었다.

토마스철학학교 철학 소사전 

2013년 6월 4일 화요일

어느 노점상의 책 이야기 1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과의 대화를 통하여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어느 노점상의 책 이야기 1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과의 대화를 통하여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이재호씨가 적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이란 책이 있다. 내가 경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읽던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경주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주라고 하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곳... 혹은 박물관과 불국사 정도만을 생각했지만, 경주는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이 책은 삼국유사라는 타임머신을 통하여 지금의 경주를 걸으며 맘은 과거 서라벌을 향하게 만든다. 음... 이 책은 나에게 시간을 여행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후 나의 가족이 함께 한 인문여행의 첫 모티브가 바로 이 책 한권이었다. 

과거 나는 그냥 책으로 고민하고 책 속에서 사고하며 논문으로 세상을 대화하려고 했다. 그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인문학을 몸으로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해인사를 걸으며 흐르는 물소리에 맘을 태우고 듣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 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실재로 이 책을 읽고, 나는 아들과 경주로 가서 불국사, 첨성대 등을 다녔다. 첨성대를 보는데... 갑자기 지금 21세기... 그저 기념품 같은 석조물이 아닌 신라 시대 살아있는 첨성대를 지나는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아들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젠 느낀다.

삼국유사의 장면을 찾아 경주를 돌아다니는 이 책의 방식에 따라서 경주를 다닐 시간은 아직 없었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다.

그냥 숲을 찾아서 몸을 쉬는 휴식도 좋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우리가 미쳐 보지 못한 곳에 작지만 이쁜 과거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타임머신들이 있다. 예를 들어, 동화사와 운문사 그리고 하회마을에 그냥 눈으로 보기 위해 간다면, 그리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맘으로 동화사를 미리 알아부고 운문사와 하회마을을 미리 알아보고 간다면, 눈으로 보는 과거의 건물 몇 채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냥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맘으로 하회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이상을 볼 수도 있고, 운문사에게 불교의 이상과 자연과 인위의 하나됨을 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미리 알고 준비한 만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하여 어떤 것도 모르면서 연애를 할 수 있는가? 그냥 이쁘구나 잘생겼구나 정도의 감탄사뿐이다. 그 이상이 되려면 그에 대한 애정으로 그를 알아가야 한다. 그렇게 알아갈 때, 그를 사랑하게 되고, 눈이 아닌 맘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운문사를 수차례 더 가게 되었고, 경주를 일년에도 몇 번을 간다. 동화사나 해인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갈 때 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온다.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그 한 권의 책은 경북대 병원 2층에서 누워 천장을 바라 보면 지내던 나에게 큰 기쁨이었고, 이젠 그 기쁨을 삶으로 풀어내며 살고 있다. 그리 많은 이가 찾는 책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맘에 크게 남은 책이란 사실이다.


2013년 6월 4일 유 암브로시오

<여기에 글을 적는다고 누가 보겠는가. 그래서 맘이 편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는 잡초... 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피는 자유가 있다. 누가 보라고 적는 것이 아니라, 내 서재 속 가득한 책 여행의 기록이다.>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my hope was so simple...


When I was too young to change my life, my hope was so simple. I wanted to be my son's good father. In my view, a good father was a strong man holding his own son's hands. I was not rich. I don't have money enough to buy a melodion used in the elementary school's lecture. I did not get good grade in musical instrument test because I was not able to play and practice my melodion. In my remember, a melodion is a sad thing that made me the saddest boy in my classroom. When I was upset because of this, My father said to me "Things, which you don't have today, are not originally useful to you." after long years, when I was married, he said to me "Sorry, Sorry, my son. I was too poor to help you to study free from money troubles." 
I cried with pain because I was able to feel the same pain he felt. My father is the best father in the world. He was not able to give me a lot of money, but He gave me the greatest love and, today, he makes my face smile in remembering my childhood. When I hold my son's hands, I hope that I have to be a good father as my father.

YU Ambrosius

2013년 3월 27일 수요일

how to make creativity...


My students ask 'how to make creativity' to me. Ok. My reply is so simple. What is creativity? How do you make creativity? When we use old things in new your era, yours places, and your ways, we make creativity. Creatively, Thomas Aquinas, William Ockham, and medieval philosophers used a ancient Greek philosopher Aristotle, who lived in  384 BC ~ 322 BC, in their own era. Their creative ideas is made of and from old ideas. Everything creative does not come from zero or future. To be a pioneer and a forerunner, we need a time machine to go to future? No! If you need some creative ideas, think how to use old things in your places, your ways. By thinking, you will make old things new in your world. I think it is creativity.

Yu Ambrosius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중세 철학에 대한 작은 단상들 1

중세 철학에 대한 작은 단상들

유대칠
(Thomas Philosophia Schola)

서론

중세 철학, 그 가운데 논리학이나 의미론을 전공한다고 말했더니, 한 목사가 중세 철학 시기에 그런 것이 있냐고 했다. 그 목사는 그리 많이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신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전공자도 아닌 이에게 들은 중세 신학사 혹은 중세 철학사나 이와 관련해 읽은 책 몇 권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중세'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광적으로 의존된 신앙에 의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화형을 해 버린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잔혹한 독재 사회 정도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중세는 그러한 공간도 시간도 아니다. 중세는 생각이 다르다고 죽이거나 화형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또한 중세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통일된 하나의 입장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입장만을 가진다면, 논쟁이 있을 수 없다. 논쟁이란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 끼리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중세 철학은 논쟁으로 가득하다. 중세 철학사 혹은 신학사는 그 자체로 논쟁의 역사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그 목사는 그런 논쟁은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 탁상공론이며 현실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물든 잘못된 신앙이라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참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중세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글을 진정 깊이 읽는다면, 어느 누구도 성서의 권위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더 앞에 더는 이는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는 범주 속에 많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그 범주 속의 철학자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근거한다면, 둔스 스코투스나 오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풀이하며 자기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이나 신학은 많은 부분 다르다.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저 자신의 신앙을 인간의 귀에 보다 더 합리적으로 알아듣기 좋은 소리가 번역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한 인물이었다.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성서의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언어, 즉 인간의 귀와 정신이 적절한 합리적 체계 속에서 이야기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종속되어 성서를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성체 성사와 삼위일체의 용어들에 등장하는 많은 용어들이 그리스 철학의 용어임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순수한 신앙만을 위해 이것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가? 그러면 신학이란 학문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가? 루터의 글에 등장하는 그 많은 개념들은 실상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신학자들은 이 시대 철학자들의 담론을 활용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이 시대의 철학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을 완전히 배제한 신학이라며, 그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배제한 맹목적 종교가 되고 말지 모른다. 인간의 신의 모상(imago dei)이다. 인간의 지성은 쓸데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모상으로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종교는 대화해야 한다. 불교든 이슬람교든 아니면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대화해야 한다. 대화하지 않고, 자신만이 바르고 다른 이는 모두가 악이라고 한다면, 그 종교 자체가 전쟁과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 왜 믿어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알아들으려는 노력 자체가 종교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신이 얼마나 존귀하게 창조하였는지를 확인하는 여정일 수 있으며 신을 만나는 여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인간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은 창조물의 본질을 알아가는 여정이며 그 여정의 결실은 인간을 온전히 바라보게 할 것이며, 그렇게 인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신을 온전히 볼 수 있으며, 신이 보기 좋았다고 하는 바로 옆의 누군가에 대해서도 열린 맘으로 다가서서 그와 하나되어 그 아픔과 슬픔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그런 역할을 한다. 철학은 종교가 옆의 사람과 대화함을 용이하게 한다. 그리고 철학을 수용하여 이를 통하여 대화하는 종교는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하며 믿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화형하는 악행을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 속 철학 없는 선교사들이 행한 수많은 악행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죽이고, 그 죽음의 공통 속에서 먹을 것을 주며 선교하던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이기적 종교관에선 선행이지만, 전지구적 관점에선 악행이다. 남미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민의 인권을 옹호하고, 그들에 대한 잔혹함을 반대한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스스로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철학을 공부하고 일부는 확고한 자기 견해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남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동아시아에 와서 <천주실의>를 적은 마테오 리치를 보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철학을 익인 인물이다. 그는 동아시아에 와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가진 철학을 익히고, 그들의 철학을 수용하고 익혀 자신의 종교를 설명한다. 설득하려 한다. 설득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종교를 이해하게 하여, 그의 영혼 속에 종교를 녹아들게 한다.

말이 길었다. 종교에서 철학은 이러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가장 활발히 확인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세'다. 그래서 나는 중세 철학의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이 수용되고 활용된 것이 중세 철학이나 신학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맹목을 지향하여 목회자와 성직자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성추행과 성폭행 그리고 각종 비리와 교회 성장주의에 대항하여 중세의 철학과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당장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대를 고민하고, 동시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가가며 현실의 고민을 하는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적어가면서 내가 아는 한에서 단순히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중세 철학자들의 이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그들이 삶 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소개하려 한다. 학자들이 아니면, 관심도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아마 그 시대의 그들도 학자들만을 위해 철학을 하진 않았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공간적으로 나는 서유럽에만 그치지 않고, 가능하면 동유럽과 아랍 그리고 유대지방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지중해 연안을 두고 진행된 철학은 그저 독불장군 처럼 있지 않았다. 서로 대화하면서 존재해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 철학자들인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와 대화했고, 유대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와 대화했다. 동유럽에 정교회 학자인 다마쉐누스와도 대화했다. 둔스 스코투스나 오캄 역시 그렇다. 중세 철학자들의 철학은 대화의 산물이다. 대화를 통하여 얻어진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대화 한 편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알아듣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나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을 나의 작은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나의 대화 상대자로 초대할 생각이다.

시간적으론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스콜라 철학과 관련된 논의들을 모두 논의의 영역에 포함할 생각이다. 데카르트가 살던 시기에도 여전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철학사의 고아로 만들 순 없다.

나는 작은 사람이다. 나의 능력이 작지만, 이 작음에도 큰 그림을 그리려는 맘을 비판말고, 응원해 주기 바란다. 이것도 욕심인가 싶다.

<2013년 3월 25일 >

2013년 3월 19일 화요일

My studying Ockham's philosophy...1

I've studied philosophy of Ockham, Duns Scotus, and Burley since 2002. Now! Ockham is my best friend. Scotus and Burley are my helpful friend. I want to restore the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relics in B.C 14. This hope is my start point. My friends have been my teachers and mentors who help me to restore the relics. Ockham's nominalism is related to the theological debate on God's absolute power  in his era. Ockham's thoughts are made from thoughts by many philosophers and theologians debating and arguing with Ockham. It is not true that Ockham's philosophy is only Ockham's thing. Ockham... 

Yu DaeChil (Ambrosio)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월터 버얼리의 저작


유명한 인물인데... 앞으로 시간이 되면 이 사람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 우선 간략하게 그의 저작들을 한번 소개해 본다. 이후 이 가운데 구해지는 것들은 읽고 공부해서 이곳을 통하여 소개하께요~

버얼리 저작
 
Quaestiones circa tertium De anima (영혼론 3권에 대한 질문들) 1301년 이전
Quaestiones in librum Perihermeneias (명제론에서의 질문들) (= QP) 1301
Tractatus de suppositionibus (지칭에 대한 논고) (= De sup.) 1302
Tractatus super Praedicamenta Aristotelis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논고) (= TsP) 1310년 이전
Commentarius in librum Perihermeneias (명제론에 대한 주해) (= CP) 1310년 이전
Quaestiones super librum Posteriorum (분석혼 후서에 대한 질문들) (= QPo) 1310년 이전
Expositio super libros Topicorum Aristotelis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에 대한 주해) 1310년 이전
Expositio libri De anima (영혼론에 대한 주해) (= Ean) 1310년 이전
Expositio librorum Physicorum (자연학에 대한 주해) 1316년 이전
De potentiis animae (영혼의 능력에 대하여)
De relativis (관계에 대하여)
Expositio in libros octo Physicorum Aristotelis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8권에 대한 풀이) (= EPhys) 1324년 이후
Tractatus de formis (형상에 대한 논고) 1324년 이후
De puritate artis logicae. Tractus longior (논리학의 학계의 순수함에 대하여. 긴 논고) (= De puritate) 1325년과 1328년 사이
Expositio librorum Ethicorum (윤리학에 대한 주해) 1334
Expositio super Artem Veterem Porphyrii et Aristotelis (포르피리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 논리학에 대한 주해) 1337. 이 작품은 포르피리우스에 대한 주해(= EIs),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주해(= EP), 여섯 원리에 대한 주해(= LsP) 그리고 명제론에 대한 주해(= EPh)로 구성된다.
Tractatus de universalibus (보편자에 대한 논고) (= TdU) 1337년 이후
Expositio super libros Politicorum Aristotelis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대한 주해) 1343

2013년 2월 17일 일요일

스콜라주의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사전>


스콜라주의 (Scholasticism) : 스콜라주의는 1100년에서 1500년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활동한 학자들에 의하여 구성된 비판적 사고 방법이다. 스콜라주의는 처음 초기 유럽 대학들에 있던 그리스도교 수도회 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에 등장한 첫 대학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11세기와 12세기 시작된다. 이들 대학은 인문학, 법학, 의학 그리고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이 당시의 대상으로는 살레르노 대학(University of Salerno), 볼로냐 대학(the University of Bologna) 그리고 파리 대학(the University of Paris) 등이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참된 대학이 언제 시작하였는지 그 확실한 시점을 규정하긴 어렵다. 비록 가톨릭교회와 여러 수도회에 의하여 작성된 당시 유럽의 고등 교육을 위한 studia generalia의 목록이 유용한 자료가 되긴 하지만, 정확한 시점을 규정하긴 쉽지 않다. 스콜라주의는 교실에서 행해진 교육 방식이기도 하며, 이는 곧 글쓰기의 방식과 맥락을 같이 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문헌과 그 문헌의 고민과 관련되어 하나의 주제가 구성되며, 그 주제와 관련된 하나의 의문(quesitio)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가 등장하고, 이 반대에 응답하는 것이 등장한다. 그리고 반대 입장과 이 반대 입장에 대하여 주어진 응답에 대하여 다시금 비판적 사고의 결실이 주어진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그 한 형태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의 방식은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고유한 교육의 방법이 되었다. 또 이는 다른 여타 학문에도 많은 연구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스콜라주의는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모색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후기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 철학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활용되는 과정에서 스콜라주의는 적절한 기능을 수행했다. 스콜라주의의 대표적 인물로는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아벨라르두스(Peter Abelard), 할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보나벤투라(Bonaventure)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학이란 공간에서 학문을 익히고 구성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모두가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으로 철학을 구성한 인물이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많은 경우 중세 가톨릭 사상가들에 의해서만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후대에 이르러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와 몰리나(Luis de Molina)와 같은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루터회(Lutheran) 소속의 스콜라주의가 있었으며, 그 이외 신교 스콜라주의자들도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카롤링거 왕조의 교육 개혁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낳는다. 피사의 페터(Peter of Pisa)와 요크의 알퀸(Alcuin of York)는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를 도와서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의 주목을 끈다. 샤를대제는 학교(schola)들을 설립한다. 이 학교들로부터 스콜라주의라는 명칭이 나온다. 이 학교로부터 중세 교육의 한 경우가 마련된다. 이 시기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서유럽 전체에선 사려져 있었다. 아일랜드에선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과 사용이 수도회 학교에 널리 퍼져있었다. 아일랜드 학자들은 서유럽 프랑크족의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 가운데 초기 스콜라주의의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5877)가 있다. 에리우게나는 매우 유능한 학자였다. 그는 그리스어에 익숙했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어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 저작들에 dmlgdu 카파도키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과 그리스어 신학 전통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초기 스콜라주의의 설립자들로는 아벨라르두스와 란프랑크(Archbishop Lanfranc of Canterbury) 그리고 안셀무스가 있다.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어 저작들의 발견, 혹은 재유입이 시작되었다. 이들 그리스어 저작들은 당시 서유럽에선 읽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10세기 초에 스페인의 학자들은 번역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12세기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려는 레콘키스타(스페인어: Reconquista, 포르투갈어: Reconquista, 아랍어: الاسترداد 알 이스티라다드) 이후 이 지역의 학자들은 이슬람 철학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랍의 무슬림 학자들에 의하여 마련된 천문학, 수학, 의학, 철학 저작을 손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유입한 중세 무슬림 학자들의 성과는 유럽 학자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한 시기, 유럽에선 롬바르두스(Peter Lombard)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 문헌의 견해와 문장을 모아 명제집(Sententiae)을 내어 놓았다. 13세기는 그리스 철학의 재유입과 이에 대한 연구가 주된 흐름이었다. 번역 학교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생겼다. 그리고 결국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바트의 아벨라르두스(Adelard of Bath)와 같은 학자들은 시칠리아와 아랍지방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저작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대한 첫 완전한 라틴어 번역이었다. 강력한 노르만의 왕들은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식을 가진 이들을 이들의 궁정으로 모았다. 모에르베케의 윌리엄(William of Moerbeke)은 많은 그리스 철학 저작들을 13세기 중반에 라틴어로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의 움직임은 그리스 철학에 대하여 당시 서유럽의 학자들이 보다 더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였다. 또 아비첸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 등 중세 이슬람의 무슬림 철학자들의 성과들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의 문헌과 중세 무슬림의 문헌이 각각 그리스어에서 그리고 아랍어와 히브리어 등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의 성과의 거름이 되었다. 대학은 13세기 동안 유럽의 거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경쟁하는 두 수도회가 대학 내부에서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 두 수도회가 바로 도미니코회’(the Dominicans)프란치스코회’(the Franciscans)이다.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시시의 프란치스(Francis of Assisi)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3세기 중엽 그들의 리더는 보나벤투라였다.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신학과 플라톤스러운 철학에 친근한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신플라톤주의에 더 친근했다. 안셀무스와 같이 보나벤투라는 이성은 오직 철학이 종교적 신앙에 의하여 철학에 조명이 주어질 때, 진리를 발견할 뿐이라고 한다. 보나벤투라 이후 대표적 인물인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철학자는 둔스 스코투스와 아우레올리(Peter Auriol) 그리고 오캄 등이 있다. 반대로 도미니코회는 1215년 성 도미니코(St Dominic)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도미니코회의 철학자로는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이들은 친 아리스토텔레스스럽다. 스페인을 걸쳐 유입된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등에 의하여 주어진 것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신앙과 새롭게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합리성이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이성과 논증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저술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활용하여 작업한 첫 철학자들의 하나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용인 신플라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기존의 보나벤투라 등과는 조금 다른 입장과 활용으로 이어졌다. 적극적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무슬림 철학의 활용은 대학 가운데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보다 인문학부 교수들 사이에 더 강화되어 있었다. 인문학부 교수들은 스스로 분명한 신앙인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의 연구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긍정하며 인간 합리성에 충실한 철학적 담론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적 결실은 교회 권력과 충돌하게 되고 1277년의 큰 금지령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시제 브라당(Siger of Brabant)과 다치아의 보에티우스(Boethius of Dacia)와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금지된다. 후기 중세의 이와 같은 다양한 스콜라주의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16세기 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는 다시금 부활한다. 이렇게 다시 등장한 스콜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주류는 1540년 이냐시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가 있다. 당시 활동한 예수회 소속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프란치스코 수아레즈, 가브리엘 바스케스(Gabriel Vásquez) 등이다. 예수회에 이어서 강력한 스콜라주의는 스코투스주의자들(Scotists)이다. 당시의 스코투스주의자는 우선 이탈리아의 안토니우스 트롬베타(Antonius Trombetta), 바르토로메오(Bartolomeo Mastri), 보나벤투라 벨루토(Bonaventura Belluto)가 있고, 프랑스인으로는 프라센(Claude Frassen), 아일렌드인으로는 와딩(Luke Wadding), 존 펀치(John Punch) 그리고 후고 코트웰(Hugh Caughwell), 마지막으로 독일인으로는 베른하르트 산니히(Bernhard Sannig), 크리스퍼(Crescentius Krisper)가 있었다. 세 번째는 토마스주의자들(the Thomists)이다. 도미니코회 소속 학자들과 갈멜수도회 소속 학자이 토마스주의자였다. 이 가운데 바네스(Domingo Báñez), 포인샷(João Poinsot) 그리고 16세기 이후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며,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코임브라의 학자들(Conimbricenses)이 있었다. 또 이러한 노선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사상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아베르사(Raffael Aversa)와 같은 인물들이다. 새롭게 시작된 스콜라주의, 즉 근대의 스콜라주의는 17세기 초반에 활짝 피게 된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이르러 계몽(Enlightenment)이 우선시 되면서 스콜라주의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수아레즈와 같은 이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학들 가운데 스콜라 문화는 다시 생생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19세기 신-스콜라주의의 배경이 된다.
루터회 스콜라주의(Lutheran scholasticism)는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의 스콜라주의다.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활용하였다. 이는 이미 당시 학계에 흔한 일이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구사한 용어는 삼위일체와 여러 신학 담론의 용어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교부 시대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 사상에 깊이 녹아 있었다. 루터회 스콜라주의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이들이 강의를 하거나 글을 적을 때 이미 그들이 선배 수많은 스콜라주의 학자들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 나름의 자리에서 그들 나름의 스콜라주의를 구성하였다. 루터회 스콜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신학적으로 그들과 다른 길을 가는 이들과 대립하고 논쟁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신학적 논리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비록 루터 자신이 그 이전 선배 신학자들의 스콜라주의를 비판하였다고 하지만, 반면 동시대 루터회 학자인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과 같은 이는 이미 루터회 스콜라주의의 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17세기에 이르러 루터회 스콜라주의가 등장한다. 이미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이 문헌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가운데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의 논의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수회와 논쟁을 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성과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루터회는 루터의 반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여러 논의에서 선배 스콜라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그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자인 오캄과 가브리엘 비일(Gabriel Biel)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터의 스승인 트루트페터(Jodocus Trutfetter)와 바톨로메우스 아르놀디 폰 우시엔(Bartholomaeus Arnoldi von Usingen) 역시 스콜라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콜라주의가 절대적으로 이성을 중시하고 신앙 이상으로 이성을 높이 본다는 평가는 잘못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오캄도 이성만으로 신으로 인간을 이끈다고 보진 않는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많은 스콜라주의 학자들 역시 인간은 계시에 의하여 신을 보다 더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이성만으로 신을 온전히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스콜라주의자들이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근거한 철학적 흐름이 시작되었고, 이는 파두아(Padua) 대학과 쿠임브라(Coimbra) 대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독일로 16세기 말 경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가톨릭교회를 넘어 결과적으로 인본주의와 연결되는 루터회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 형이상학 체계를 야기한다.
루터회 이외에도 개신교 가운데 스콜라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Reformed scholasticism) 학자들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칼빈(John Calvin)은 체계적으로 신학을 교육받지 못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초기 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같이 그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인본주의들의 영향과 여러 영향으로 그 역시 루터와 같이 스콜라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지금에 와 차근히 분석하면 그가 스콜라주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공된 많은 구분들과 개념을 사용한다고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스콜라주의에 대하여 편향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도 그렇지만 칼빈 역시 그들이 마주하는 스콜라주의는 그들 시대에 마주하는 전문적인 신학자에 의하여 주어진 중세 스콜라 신학 정도일 것이다. 이들이 비록 이성만을 강조하고 이성을 신앙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어쩌면 인본주의 시대, 인간이 중심인 시대에 대학 공간에 한정된 전문화된 담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을 수 있으며, 그 거부감이 곡해(曲解)를 낳았을지 모른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결실이 설교자와 일반 대중에 의하여 읽혀지고 사용되길 원했다. 그는 순수한 사변적 스콜라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학교 혹은 대학 내부에서 전문적인 신학적 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유용한 것이 되고 활용 접근이 용이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에 발현으로 보인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이미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예를 들어, 버미글리(Vermigli)가 있다. 또 일정 부분 칼빈에게도 보인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항상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예수회 추기경인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와 같은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 학자들로 부터의 신학적 공격은 전통적인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그리고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와 잔키(Girolamo Zanchi)와 같은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개신교 신학자들은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인 의문(quaestio) 방법론을 자신들의 스콜라신학의 수단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개신교 신앙 고백을 엄격하게 풀이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앞서 있었고, 이후 예수회 등에 의하여 이어지며, 동시에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공존하였다. 그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신-스콜라주의가 등장한다. -토마스주의가 중심이 되어 등장한다.

유대칠 씀
(토마스철학학교) 

2013년 2월 9일 토요일

유학장의 작은 이야기 1 철학...

유학장의 작은 이야기 1

'철학'이 무엇인지 '궁리'한다. 어쩌면 그 '궁리' 자체가 철학이 아닐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행위, 아니 모든 존재자의 이치를 궁구하는 행위 자체가 철학이 아닐가? 1905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작성한 라틴어 문법서에서 philosophia를 '격물궁리'라고 번역한 것을 우연히 보았다. 아! 갑자기 불경을 번역한 두 거인 쿠마라지바와 현장이 생각났다. 쿠마라지바는 백인이며 산스크리트어를 모국어 처럼 한 인물이다. 왕족이지만 포로가 되어 잔혹한 오랜 포로 생활 동안 삶으로 중국어와 한문을 익힌다. 현장은 다르다. 그는 유학을 가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체계적으로 익힌다. 그리고 그는 그 언어를 가진의 언어인 한문으로 직역한다. 문법적으로 일치하게 하기 위해 직역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다르다. 그는 한문을 사용하는 동아시아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도유럽어족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사상을 문법이 아닌 그 의미를 전달하러 한다. 극락, 지옥,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모두 그의 번역어다. Philosophia를 일본인 학자는 현장과 같이 문법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번역했다. 희철학이다. 지혜를 바란다는 의미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philosophia와 문법적으로 일치하는 듯 하다. 지금 철학이란 번역어도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외국인으로 조선땅에 온 선교사들은 문법적으로 일치가 아니라, 서구의 언어로 된 자신들의 사상과 종교의 의미를 이해시키고 싶있나 보다. 우주의 이치를 궁구하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는 동아시아 성리학의 격물궁리라는 말로 philosophia를 번역하고 있다. 학교가 아닌 삶에서 한문을 익힌 쿠마라지바와 민중으로 파고들고자 한 선교사... 이들의 번역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유대칠...그냥 한번 생각나는대로 흘러가며 적어본다...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페트루스 올리비(Peter Olivi)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생각


페트루스 올리비(Peter Olivi)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생각

유대칠 옮김
(토마스 철학 학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그리스도교 철학자다그의 논의는 상당 부분 그리스도교 신앙의 것과 조화되기 힘들다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많은 철학자들은 나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저마다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장들은 그들의 철학에 반영되었다-그리스도교 철학자이지만아리스토텔레스를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으며무시하기 힘든 철학자였다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성의 최고점이란 칭송을 받기도 했다오캄둔스 스코투스토마스 아퀴나스 등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저작에 대한 주해를 남겼으며그의 철학적 논의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였다그러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의 비-그리스도교 철학자라는 것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올리비는 신앙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낸다물론 올리비의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그는 여전히 그를 인용하고 있으며그의 논변을 두고 고민한다하지만 신앙에 대한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α> Catherine König-Pralong "Olivi et le formalisme ontologique Lectures dAristote dAverroès et critique dAlbert, " in Pierre de Jean Olivi - Philosophe et théologien, ed. Catherine König-Pralong, Olivier Ribordy, Tiziana Suarez-Nani, (Walter de Gruyter, 2010) 135-168. 161.

β> Peter John Olivi. Quastiones in secundum librum Sententiarum, ed. B. Jansen (Quaracchi: Ad Claras Aquas, 1922) v. 3, Quaestio XVI, 342.

α> Aristoteles etiam non hic videtur ibi sentire, licet mihi non sit cura quid hic vel alibi senserit; cuius enim auctoritas et cuiuslibet infidelis et idolatrae mihi est nulla, et maximae in iis quae sunt fidei christianae aut multum ei propinquam.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에 관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한 듯 여겨지지 않는다비록 나에게 그가 이것 혹은 다른 것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하였는지를 고려의 대상이 아니지만그의 이교적이고 우상화된(idolatae) 모습과 그의 권위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특히나 이 문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속하는 문제 혹은 그것에 대하여 다루는 것에서 말이다.
β> decimum dicendum quod christiano viro sola scriptura sacra et fides catholica debet esse in robor et culmen auctoritatis; et ideo posito quod omnes pagani falso dicti philosophi contrarium senserint aut aliqui eorum, non est mihi cura.
열 번째 논의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에게 오직 성서와 보편적 신앙만이 권위의 핵심이고 최상의 상태라고 말 되어야 한다그러므로 비록 철학자라 불리는 이교도들이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거나 혹은 그 가운데 일부를 생각해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 번역문의 무단 인용은 금합니다. 혹시나 인용시 꼭 토마스 철학 학교 블로그 혹은 Thomas Philosophia Schola Blog로 부터의 인용이란 출처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면도날- 후기 중세 철학자들에게 필요성과 철학방법론의 문제


스코투스의 면도날!
- 후기 중세 철학자들에게 필요성과 철학 방법론의 문제
 
유대칠 생각하고 정리함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을 함에 있어서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정하고,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흔히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의 면도날 혹은 면도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그러한 면도날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The Extremely Subtle Questions on the Books of Metaphysics of Aristotle, Book VIII, Q.1, n.22에서 발췌되어 번역되었다.
 
Aliter dicitur ad quaestionem quod paucitas semper est ponenda quando per ipsam salvantur apparentia . . . Et ideo positio plurium semper debet dicere necessitatem manifestam propter quam ponantur tot; nihil autem apparet in accidentibus propter quod debeant poni composita ex duabus partibus essentialibus, communiter loquendo . . .Ideo communiter negatur talis compositio.
다른 방식으로 [우유는 단순한 것인가 혹은 복합된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항상 그 자체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현상이 있을 때 몇 가지만을 취해야한다고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것이 가정될 때, 우리는 다수의 것이 가정되기 때문에 항상 명백하게 필요한 것만을 판단해야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유가 두 가지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합성되어질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러한 합성은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오캄의 면도날 혹은 면도칼이라고 하는 것은 오캄만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방식이 다를 뿐, 중세의 많은 철학자들의 각자 나름의 자리에서 필요 이상의 논리적 산물을 양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철학자의 태도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그의 신학대전1, q.2, q.3에서 나름의 면도날을 보이고 있다. “적은 논리를 통해 완성되어질 수 있는 것이 다수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quod potest compleri per pauciora principia, non fit per plura) 그리고 오캄과 동시대 혹은 그와 시대적으로 서로 교집합을 형성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면도날은 오캄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필요 이상의 것을 제거하며 논리를 구성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태도이다. 그런데 왜 철학사는 이를 오캄에게 한정하게 되었는가? 어쩌면 그가 유명론자 혹은 개념론의 길을 가기에 실재론자들과 구별하며, 그가 보편자를 면도날로 잘랐기에, 그의 면도날을 중세 철학사의 면도날의 대표격으로 높인 것일까? 그러나 분명 위와 같이 스코투스 역시 면도날을 주장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면도날을 주장했다. 이들은 실재론자들이다.
 
면도날과 관련된 후기 중세 철학자들의 필요성(neccesaritas)과 관련된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필요성과 철학의 방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적은 원리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다수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 q.2, a.3.
 
둔스 스코투스는 필요성과 철학의 방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다수성(pluralitas)은 필요성(necessitas)이 없을 때 가정되지 않아야 한다.”Duns Scotus, I Ordinatio, d.3, p.3, q.1 ( ed. Balic 3, 224 ).
다수(plura)는 필요성 없이(sine necessitate) 가정되지 않는다.”Duns Scotus, De primo principio 3, 16.
 
윌리엄 오캄은 필요성과 철학의 방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철학자는... 모든 드러난 것이 더 소수의 것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을 때, 다수를 가정하지 않는 명제들을 가정한다.” William Ockham, Expositio in libros physicorum aristotelis, 3, c.10 (OPh.4, 525).
필요성 없이 그리고 근거 없이 다수성이 가정되기에 이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William Ockham, Summa logicae 1, 57 (OPh.1, 185).
심적 명사 가운데 가정되는 그러한 다수성은 그리 큰 필요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William Ockham, Summa logicae 1, 11 (OPh.1, 11).
다수성은 필요성 없이(sine necessitate) 가정되지 않는다.”William Ockham, Expositio in libros physicorum aristotelis, 1, c.11, §9 (OPh.4, 118).
 
월터 채톤(Walter Chatton)은 필요성과 철학의 방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
 
다수성은 필요성 없이 가정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Walter Chatton, I Lectura, prol. q.2.